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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note pad

김이설 '환영'

우리만 쓰는 화장실이어서 좋다고 생각했던 건 기억나지도 않았다. 

아이 하나를 씻기지도 못하는 좁은 화장실이었던 것이다. 

아이를 씻기고 온 방에 튄 물을 닦을 때마다,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만. 

그건 욕심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29p.

 

 

 

 

세상에 비싸지 않은 것이 없었다.

(중략)

분명히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편이 공부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생활은 가능하지만 꿈을 이루기에는 힘들었다. 

배는 부르지만 희망에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36p.

 

 

 

 

대학에 다니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없는 집에 그런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중략)

아버지, 엄마, 나까지, 어른 셋이 벌어도 학비는 커녕 먹고사는 일도 팍팍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앓아 누웠다. 겹경사도 줄초상이라고 했다.

항암 치료 같은 건 엄두도 못냈다. 

아버지는 스스로 이불을 깔고 자리에 누웠다.

없는 집은 하루하루가 늘 진창이었다. 

39p.

 

 

 

 

참을 만큼 참고도 더 참아야 하는 건 가족이었다.

남은 반찬만 갖다 버릴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식구도 갖다 버렸으면 싶었다.

앓아 누웠던 아버지가 죽기까지 그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다.

(중략)

한번 상을 엎으니,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내 화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에게 이런 기질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면 남편은 어쩌지 못하고 아이만 끌어안고 오도카니 서 있었다. 

먹여 살려야 하는 저 둘 때문에 울고 싶었다.

46-47p.

 

 

 

 

 

민영의 말대로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우리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었다.

조금 낮은 곳으로, 조금 넓은 곳으로, 조금 더 화사하고, 조금 더 허리를 펴고 살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생겼다.

기대가 커질수록 민영의 말투는 위압적으로 바뀌었다.

눈빛도 이상해졌다. 그 기대만큼 민영에게 더욱 충성했다.

53p.

 

 

 

 

언제나 처음만 힘들었다. 

처음만 견디면 그다음은 참을 만하고, 견딜 만해지다가, 종국에는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58p.

 

 

 

 

따지면 세상의 모든것이 그랬다. 

버티다 보면 버티지 못할 것은 없었다.

 

(중략)

 

물은 느리고, 또한 무심하게 흘렀다. 

시간도 그렇게 흐르기 마련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중략)

 

이제 나도 내 마음대로 반찬을 싸가게 되었다. 그게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59p.

 

 

 

 

아이가 뒤집고 이가 나고, 기어다니고, 혼자 앉고,

말을 시작하는 거 지켜본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남편이었다. 

 

(중략)

 

완벽해 보였다. 

작지만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는 방이 있고, 아이가 있고, 남편이 있다.

구수한 된장 냄새가, 뭉근한 밥내가 오늘 하루의 고단한 일쯤은 잠깐 잊어도 된다고 위로하는 것 같았다.

말간 얼굴의 아이, 조록의 화분, 알록달록한 장난감, 창문에 맺힌 부연 습기,

평화라든지 행복이라는 단어와 어울릴만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싱크대 앞에서 고무장갑을 낀 남편의 뒷모습이나

아빠만 찾는 아이의 새카만 정수리가 등골을 선연하게 만들었다.

(중략)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하는 걸까.

63p.

 

 

 

 

 

뭐 잘난게 있다고 다들 저렇게 뻔뻔한지.

나는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71p.

 

 

 

 

남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기 전, 미안해, 라고 말할 때면 소름이 돋았다.

그때만큼 남편이 무능하게 느껴질 때가 없었다.

치가 떨렸다.

73p.

 

 

 

 

수술 같은 건 꿈도 꾸지마.

우리 같은 형편에 아프기까지해? 그게 가장의 도리니? 

엄마는 누운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매몰차게 말했다. 

남은 식구들 고생시키고 죽기만 해봐.

내가 먼저 죽일거야.

아픈 아버지는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그게 엄마 속을 더 뒤집는 모양이었다.

77p.

 

 

 

 

좋은 일인가. 생전 처음 보는 사내 앞에서 옷을 벗고 받는 돈이었다.

금반지도 생기고 화장품도 생기고 옷도 생겼다.

그래도 옥탑방에 살고, 통장의 잔액은 늘지 않았다. 

나는 눙숙하게 다리를 벌렸지만, 물가에 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81p.

 

 

 

 

몸이 아플수록 허망했다.

이러다가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82p. 

 

 

 

 

나는 아버지가 간암이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처참하게 죽었는지, 그렇게 죽는 걸 방치했던 식구들의 마음이 어땠는지 꺼내기 싫었다. 

85p.

 

 

 

 

아주 오랜 시간 여기서 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정해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앞치마에 팁으로 받은 만 원짜리는 모서리가 나달거렸다.

105p.

 

 

 

따지면 엄마뿐만이 아니었다. 

준영도 민영도, 늘 그렇게 말했다.

누나 돈 있어? 언니 돈 있어? 야, 너 돈 있지? 있으면 좀 줘봐.

왜 만날 나만 돈을 내놨을까.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엄마의 어색한 말투와 낯선 남자의 목소리 때문에 정신이 들었다.

지난번 민영에게 보낸 돈도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푼돈 같았지만 야금야금 준영에게 들어가는 돈도 수월치 않았다. 

따지면 나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판국 아닌가. 

106p.

 

 

 

 

 

나머지 네 식구가 덤벼도 술에 취한 남자의 완력은 이겨낼 수가 없었다. 

길들여졌기 때문이었다. 의레 맞아왔기 때문이었다. 

이겨낼 수 없다는 오래된 좌절이 사태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없앴다. 

108p.

 

 

 

아이 생각을 하면 어디선가 녹슨 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를 따르지 않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분했다.

어린것에게 어미로 인정받지 못하는 서러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떨어져 지내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웠다.

그런데도 가볼 생각을 못했다. 나도 아이가 두려웠다. 

아이가 나의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이었다. 

125p.

 

 

 

 

남편에게 걸었던 희망이 사라진 것보다, 

그런 남편을 믿었던 내가 더 측은했다.

부질없는 희망은 빨리 버려야 했다.

126p.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지나가게 된다.

그것이 가장 큰 위안이었다. 

149p.

 

 

 

 

아이의 걸음이 더딘 건 진통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은 아닐까. 

아이의 잘못은 모두 엄마가 원인이었다. 

나는 그게 늘 괴로웠다. 

151p.

 

 

 

 

나는 울먹이는 엄마의 숨소리를 듣다가 천천히 말했다.

"나도 죽지 못해 살고 있어. 그러니까, 자꾸 전화하지 마,엄마."

남편이 계단에 우뚝 서서 나를 올려다봤다.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엄마가 계속 걸었다.

나는 전원을 끄지 않고 그냥 벨이 울리게 뒀다. 

엄마보다 끈질길 자신이 있었다.

모든 일은 한꺼번에 터지곤 한다. 어떤 일이 더 생겨야 최악이 되는 걸까. 

154p.

 

 

 

 

아침 열시부터 열네 시간 일을 하고 옥탑방으로 걸어 올라가는 일이 하루 중에 가장 힘겨운 일이었다.

169p.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첫 한발짝 떼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처음 한 발짝이 다음 한 발짝을, 

다시 한 발짝을 디딜수 있게 했다. 

187p.

 

 

 

 

왕백숙집으로 출근하던 첫날 아침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건 잘했다.

누구보다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19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