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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XXXX

김이설 '환영' (2011)

내가 만든 소설 속 인물들을 모두 한자리로 불러들이고 싶다. 
그리곤 그들에게 내가 막 끓여온 미역국을 대접하는 것이다.
뜨거운 국물로도 마음이 녹지 않는다면, 그래서 조금 더 바짝 붙어 앉아 화톳불이라도 피운다면,
기꺼이 내 소설이 박힌 책들을 찢어 불쏘시개로 쓰겠다.
내 소설을 태워 잠시나마 그들의 몸을 덥힐 수만 있다면, 내 무용한 소설이 가장 유용한 순간이 될 것이다.

 

김이설의 또 다른 소설, '오늘처럼 고요히'에 실린 작가의 말이다.

나는 이 소설에 실린 작가의 말을 읽은 뒤로

당장 읽지는 않더라도, 김이설의 소설은 구비해두고 봤다. 

 

 

 

 

위에 인용한 작가의 말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 적이 있었다. 

그게 3년 전 게시물이라는 알림이 떠서 

문득 김이설의 다른 소설이 읽고 싶어 졌고 

당장 눈에 들어온 책이 '환영'이었다.

 

다소 역겹고 넌덜머리 나는 상황 설정 때문에

도입부에서 중반까지 넘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덮어둔 이야기였다.

 

이마저도 1년은 족히 넘은 일이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책을 읽기 시작했고 

잠이 들 때까지만 읽으려 했던 책이었는데 밤새워 다 읽었다.  

 

그것도 페이지마다 연필로 쌍욕을 적어가면서..ㅋㅋㅋ

 

 

 

 

 

주인공은 아픔과 병 마저 죄로 여겨질 만큼 가난하고 모진 환경에서 자란다. 

가족들이 요구하는 돈을 대주느라 집을 날려먹고 

고시원 살이를 하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하는 바람에 

무능력한 남편과 살림을 차리게 된다. 

 

노모의 돈을 받아 공무원 공부를 하며 자신과 애까지 가져버린 남편은

자신과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다 한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공은 단지 형제들 중 가장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모든 걸 믿고, 어쩌면 이 지긋지긋한 생활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여동생에 돈을 빌려주고

결국엔 빌려준 돈이 떼인 돈이 되어 고시원 살이를 했으면서도 

공무원이 되겠다는 남편 뒷바라지를 자처하며 일을 하기 시작한다.

평생 식구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별다른 경력도, 재주도 없는 여자를 받아주는 곳은 

식당 간판을 달고 성매매를 하는 업소였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는 생활 속에

주인공은 지쳐가고

자신을 내려놓고 버리기 시작한다. 

 

심신이 지친 주인공은 

 

자신의 엄마가 아픈 아빠에게 그랬듯,

남편에게 고함을 치고 악담을 퍼부으며 물건을 집어던진다. 

 

자식의 분유값, 기저귀 값을 대기 위해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일을 하는데도 

자식은 아침부터 밤까지 밖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는 자신을 반기기는커녕 낯설어한다. 

 

단지 돈이 없기 때문에 기가 죽고 굽신거리던 여자는 

돈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며 살아도

당장에 닥쳐오는 현실들은 무자비하기만 하다. 

풀리는 일은 없었다. 

 

모진 현실은 꼭 약자 앞에서만 강하다. 

꼭 당하는 사람만 당하고

뺏기는 사람만 뺏기고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난이나 병만큼,

내 잘못이 아닌 잘못이 있을까.

 

여자가 취직한 식당의 사장은 

여자가 막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열심히만 하면 돈은 더 벌 수 있다.'라는 말을 한다. 

어쩌다 '열심히만 하면'이라는 말이

남의 등이나 처먹는 사기꾼이나 할 법한 말이 되고

'노력'과 '성실'이 미련하다 바보 취급을 받고 

웃음거리로 쓰이게 된 건지 모르겠다. 

 

성실함과 노력 같은 과정들이 보상받지 못하는 사회에

자정작용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열심히' 살아 더 돈을 손에 쥐게 되더라도

주인공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기쁘지 않다.

몸이 아플수록 허망해져 간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놓아가며

손에 쥔 것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스스로를 놔버리며 생긴 균열은 어떤 것으로도 메꿔지지 않는다.

 

주인공은 나를 갉아먹고 괴롭게 하는 것들은 

더 이상 '희망'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임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버티고 또 버틴다.

 

끊임없이 닥쳐오는 불행 속에서도

주인공은 악착같이 버티려 하고, 벗어나 보려 하지만 

결국엔 제자리걸음이었다. 

 

꼭 남들보다 가진 게 없으면, 

행복해서는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결국 여자는 스스로를 탓한다.

아이의 장애도, 지금 자신이 이런 생활을 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탓이라 여긴다. 

 

 

딱 한번 아이와 식구들이 모두 모여 앉아

웃으며 밥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불행밖에 없던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평화로웠던 장면인데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그 장면이 계속 떠올라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책을 읽는 내내

남이 내 인생을 망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도 

남이 내 인생을 일으키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곱씹었고 

그렇기에 함부로, 미련하게 자신이 아닌 이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기대하고 희망을 가지던 주인공이 싫기도 했다.

 

내가 불리한 상황일수록, 약한 존재일수록 

더 똑똑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단지 버티고 서있는 것 만이 최선인 상황도 있는 것이고

지독한 상황이 사람을 지독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가난 때문에 몸을 팔고 아이를 저버리기까지 했던 여자. 

그저 환영에 지나지 않았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

 

물론 아무리 운다고 해서 달라진 게 없다고 한들 비틀어질 필요는 없다. 

옹호할 일도 아니지만,

여자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으면서 덮어놓고 비난할 수 있을까.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어떤 사회적 불합리와 굴례를 벗어날 수 없을 때.

그것의 책임을 온전히 개인에게 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부와 가난이 지속적으로 대물림되는 것,

그로 인해서 형성된 기형적인 계층 사회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흙수저'의 성공이 '신화'가 되어버린 사회

그리고 이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이 그렇듯

이런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구역질 나는 상황들.

 

나는 항상 이런 것들의 원인은 

평등하지 못한 교육기회와 정상적이지 못한 교육환경에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토록 처절한 주인공의 삶을 빌어

고작,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려던 게 아닐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지 

어째서 이 사람이 이렇게 까지 살아야 했는지에 대해

개인의 비극이 더 이상 개인만의 비극이 아니고

책임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