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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note pad

한강 '흰'

그러니 확언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 이가 나에게 때로 찾아왔었는지. 잠시 내 이마와 눈언저리에 머물렀었는지.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 애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는지. 어둑한 방에 누워 추위를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해독할 수 없는 사랑과 고통의 목소리를 향해, 희끗한 빛과 체온이 있는 쪽을 향해, 어둠 속에서 나도 그렇게 눈을 뜨고 바라봤던 건지도 모른다. 

p.36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p.40

 

 

 

 

 

부서지는 순간마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p.58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ㅇㄹ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p.59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p.83

 

 

 

모래

 

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p.90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방금 울었거나 곧 울게 돌 사람이 아닌 것 처럼.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처럼.

영원을 우리가 가질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던 시간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p.95

 

 

 

 

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 

p.96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p.98-99

 

 

 

 

그 생명들이 무사히 고비를 넘어 삶 속으로 들어왔다면, 그 후 삼 년이 흘러 내가, 다시 사 년이 흘러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임종 직전까지 그 부스러진 기억들을 꺼내 어루만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본다. 

p.117

 

 

 

 

당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는 다르게 보았다. 당신의 몸으로 걸을 때 나는 다르게 걸었다.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종종 캄캄하고 깊은 거울 속에서 형상을 찾듯 당신의 눈을 들여다봤다. 

p.118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p.123

 

 

 

 

입을 다문 채 우리들은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하게 부푼 잿빛 날개 같은 연기가 허공에 스미고 있었다. 사라지고 있었다. 삽시간에 저고리를 태운 불이 치마로 타들어가는 것을 나는 봤다. 

무명 치마의 마지막 밑단이 불꽃 속으로 빨려들어갈 때 당신을 생각했다. 당신, 올 수 있다면 지금 오기를. 연기로 지은 저 옷을 날개옷처럼 걸쳐주기를. 말 대신 우리 침묵이 저 연기 속으로 스미고 있으니, 쓴 약처럼, 쓴 차처럼 그걸 마셔주기를.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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